(文字访问部分) TV를 틀었더니 이동욱이 수염을 달고 산과 들을 내달리고 있었다.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드라마 <천명>에서 이동욱은 인종 독살 음모에 휘말려 도망자가 된 내의원 의관을 연기하는데, 문득문득 이게 내가 알던 이동욱이 맞나 싶어 TV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순간들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지난 15년간 끊임없이 TV로 보아온 남자가 왜 갑자기 예전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거지? 수염 때문인가? 물론 수염 때문만은 아니다. 이동욱은 지난 몇 년간 거의 천지개벽에 가까운 변화를 겪은 배우 중 하나다. 1999년 데뷔한 이후 이동욱은 흔히 드라마 PD들이 ‘젊은 실장님’ 역할로 점찍을 만한 배우였다. 두어 편의 영화는 그냥 과외 활동 같았다. 그러고는 군대를 갔다 왔다. 제대 후 복귀작 <여인의 향기>에서는 재벌 2세였는데, 이게 또 그냥 보아오던 재벌 2세와는 어딘가 좀 달랐다. 이동욱은 그걸 끝내자마자 버라이어티쇼 <강심장>의 사회자가 됐고, 2NE1의 씨엘과 맥주 광고에 출연했다. 이제 좀 느슨하고 탁 풀린 예능적 배우가 되려나 싶던 차에 또 한 번 턴을 했다. <천명>이었다. “일주일에 일곱 번 촬영이에요. 밤새 찍고, 아침에 잠깐 두 시간 자고 여기로 바로 온 거죠.” 사실 이동욱은 뭔가 조금 불안한 기색이다. 그건 어쩌면 이제 6회 정도 방영한 <천명>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생각만큼 시청률이 많이 올라가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그리고 미안하고요.” 미안하다니? 배우가 드라마의 시청률에 온전히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 만약 배우가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지나친 겸손에 불과하다. “그래도요. 제가 이 드라마에서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보니 미안함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어요. 극 초반의 제 캐릭터 설정이 기존 사극과는 좀 달랐잖아요. 전략적인 연기적 선택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꽤 거부감을 보이더라고요. 아.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다 맞는 건 아니구나. 대중의 마음은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역시 맞지 않는 옷
을 억지로 껴입으려 했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했다면 더 잘되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결국 동료들에게도 미안해진 거죠.” 물론 이동욱에게 그만한 각오가 없었을 리는 없다. <천명>은 이동욱의 첫 번째 사극이다. 캐릭터는 딸을 둔 애비다. 30대 초반의 남자 배우에게 이처럼 야심적인 선택지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는 훨씬 단순한 마음으로 결정을 했어요. 연기를 15년이나 해왔는데 사극도 한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90%의 주변 사람들이 걱정했어요. 사극인 데다 아버지 역할인데 이동욱이 어울리기나 하겠냐고요. 그 순간 조금 가슴이 덜컹했죠. 아니. 내가 겨우 이 정도였나?(웃음). 후회하진 않아요. 아니. 잘한 것 같아요. 이런 고비는 언젠가 분명히 왔을 테고, 이걸 겪으면서 제 안에 더 많은 것들이 쌓일 테니까요.” 가장 궁금한 건 이동욱의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선택들이 대체 어디서 출발했냐는 것일 게다. <여인의 향기>와 <강심장>과 <천명>으로 이어지는 지난 2년간의 행보는 갈지자라면 갈지자고 널뛰기라면 널뛰기다. 모두가 안전한 선택을 강요하는 지금 연예계에서 그의 변화는 확실히 좀 위태롭게 재미있다. “군대 덕분이에요. 군대 갔다 오자 달라졌어요. 아등바등해봐야 별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죠.” 이런 늙은이 같은 소리가 있나. “
뭐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을 두고 이래 보고 저래 봐야 별 의미가 없는 거더라고요. 사실 군대 가기 전엔 되게 불안했거든요.” 이 불안의 의미를 아마도 군대를 갔다 온 남자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연인이, 친구가, 세상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 “군대 가기 전에 대단한 스타라거나 연기로 확실히 인정을 받는 배우는 아니었잖아요. 2년 사이에 내 자리를 누군가 대신하고 있을 것이고, 후배들도 성장을 했을 텐데 나는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강했어요.” 실제로 군대는 많은 젊은 배우들에게 경력의 무덤이 되어왔다. 지금 당장 머리를 굴려보시라. 제대 이후 완전히 잊힌 몇몇 톱스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럼요. 어느 순간 왜 그 배우는 안 보이지? 생각해보면 딱 군대 갔다 와서 사라진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제대하고 나오니 다 쓸데없는 고민들이었죠.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말하는 경계란, 진지한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를 가르는 경계다. 진지한 배우는
예능을 하지 않는다는 고색창연한 배우 세계의 믿음 말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예능 하는 친구나 가수 친구들을 만났는데, 어느 순간 제가 하나 깔고 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 내가 왜 이러지? 이게 아닌데? 배우 따위 뭐가 잘났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갑자기 스스로를 뉘우치게 됐죠. 게다가 개그 하는 친구들이 매일매일 아이디어를 짜는 걸 보며 감탄했어요. 배우들은 대본을 받아야 비로소 고민을 시작하는데 그들은 365일 24시간 계속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 제가 몇 수 아래구나 싶었죠. 그러다가 <강심장> 제의가 들어온 거예요. 군대에 같이 있었던 붐이 그랬어요. 형이 연기자란 건 세상이 다 아는데 <강심장>을 하게 되면 또 하나의 무기가 생기는 거 아니냐. 사실 되게 뻔한 이야긴데 깊게 와 닿더라고요.(웃음)” 돌파구가 필요했다는 이야긴가? “아뇨. 돌파구랑은 다른 거예요. 연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 이동욱의 선택이었죠.” 그렇다면<강심장> 직후 <천명>을 선택한 이유도 돌파구와는 다른 의미였던 건가? “극에서 극으로 가보고 싶은 욕심이었어요. <강심장>의 이동욱으로부터 한 번 또다시 제대로 확 꺾어보자는 마음. 그런데 너무 극에서 극으로 달렸나 싶기도 하고요.(웃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죠. 신동엽 형이 항상 그래요. 다 의미 없어. 다 필요 없어.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겁게 살아.” 지금 한국에서 가장 웃기는 남
자의 말이라면 믿고 따라도 좋다. 단,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그래 놓고 동엽이 형이 그래요. 법의 테두리만 벗어나지 않으면 돼.(웃음)” 다시 수염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건 진짜다. 사극을 위해, 혹은 익숙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배우들이 공들여 만들어 붙이는 가짜 수염이 아니다. “어차피 매일 붙여야 하는데, 차라리 진짜로 길러보는 게 어떨까 싶었어요. 드라마가 그렇잖아요. 쉬는 시간이 없으니까, 계속되는 연속성이 있어서 캐릭터에서 빠져나올 시간을 안 줘요. 아이러니하지만 자연스럽게 캐릭터와 사는 거죠.” <천명>은 이제 막 시작했다. 이동욱은 당분간 계속 진짜 수염을 달고 조선 시대 산과 들을 달릴 거다. 아직 차기작이고 뭐고 결정한 건 하나도 없다. 그게 뭐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다음 행보도 꽤 급격하고 마찰 강한 턴이 될 게 틀림없다. 그 턴